본문 바로가기

체육사

그리스의 체육사 - 아테네의 체육 1

그리스는 체육사상 중요한 역할을 하며, 고대 그리스의 발상지인 발칸 반도에 위치해 동서 문화의 육교적 역할을 담당하며 체육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지형적 특수성 때문에 폴리스라는 도시국가가 성립하게 되었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다. 평야는 전체 토지의 20% 정도로, 험한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어 강인한 체력의 유지와 활기찬 신체적 움직임을 요구하는 환경에서 인구가 발전하였다.
그리스의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문화적으로 다른 도시국가였습니다. 스파르타는 강력한 전제주의 국가이고, 아테네는 민주주의와 자유권을 중시하는 국가였습니다. 그리스는 상류계급이 존재하며,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스는 호기심이 많은 국민들이 배우고 여행하며 관찰하는 것을 즐기며, 예술과 체육에서도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겼습니다.

 

1. 아테네의 체육

이오니아족이 테세우스를 선봉에 두고 세운 아테네는 평화적인 민족으로, 올리브와 곡물 생산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타 중심의 동맹국인 펠로폰네소스가 아테네를 공격하면서 B.C 431~BC 404년까지 전쟁이 계속되었다. 아테네는 더욱 자유롭고 진보적인 민주사회로 발전했다.

 

1) 아테네의 교육

아테네 교육은 왕정체제에서 민주정치체제로 전환됨에 따라 첫째로 시민적 책임의식과 심신의 조화적 발달, 둘째로 교육적 책임이 가정으로부터 출발하며, 셋째로 지적, 신체적, 정서적인 발달을 조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개인주의와 출세주의 교육풍토로 인해 애국적인 건전한 사회풍토가 약화되었고, 여성과 서민은 교육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로 인해 로마의 실용적 힘에 밀려 선진화를 놓치게 되었다.

 

2) 체육의 목적

아테네 체육은 미와 심신의 조화적 발달을 추구하며, 개성을 발전시키는 교육의 한 부분으로 인식됐다. 체육은 군사력 강화에도 이용됐지만, 철학자나 예술가들은 체육을 통한 미적이고 이상적인 새로운 인간 형성을 강조했다. 또한 체육활동은 조화를 이룬 신체를 갖기 위한 것으로 미적 규준에 의해 이루어졌다. 초기 아테네 사람들은 체육을 통해 용기, 겸손, 결단, 스포츠맨십이 길러지며, 조화로운 성격형성을 추구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후기에는 '지혜로운 인간'을 추구하는 지성교육으로 바뀌었다. 체육 교육은 보수를 받는 직업선수들을 통해 즐기는 것으로 변모하였고, 직업운동선수들에 의한 경기가 성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운동부족과 사치스러운 생활로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식이요법과 위생적인 생활 등이 필요하게 되었다. 선수들에게 주어졌던 월계관은 비싼 상품으로 대체되고 명예를 걸고 도시를 대표하던 경기자들은 물욕에 사로잡혀 돈에 매수되어 올림픽 경기는 타락했다.

 

3) 체육의 내용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비해 국가 규제가 적었으며, 부모에게 교육 선택권을 부여하였다. 국가는 체육관 유지비 이외의 교육에 대해 재정 지원을 하지 않았으며, 취학 연령, 학급 규모, 도덕 교육 유지 등 일부를 결정하였다. 다만, 군인 자녀의 교육비는 국가가 부담했다. 아이는 출생과 함께 부모의 신체 적합성 여부에 따라 양육을 받으며, 7세까지 어머니와 유모의 책임과 지도 아래 어른을 공경하며 성장한다. 이후 소녀들은 가정에서, 소년들은 사립 초등학교에서 체조와 음악, 문학, 산수 등을 배우게 된다. '팔래스트라'는 레슬링 학교로, 넓은 경기장과 수영장, 특별실 등을 갖추고 있어 체육 교육에 적합하다. 체육교사는 필요한 보조 교사와 교수진을 고용하고 수업료를 받았으며, 어린 소년들은 노예인 파이다 고 구스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교육은 아테네 시민권을 가진 소수의 자녀에게만 제공되었으며, 16세부터는 공립 체육장인 짐나지움에서 더 높은 수준의 신체적 훈련과 애국정신의 훈련을 받았다. 18세가 되면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자격심사를 받고, 명예로운 아테네인의 맹세를 포함하여 공적인 의식에 참가하게 된다.
"나는 이 신성한 무기를 욕되게 하거나 곤경(困境)에 처한 전 우를 보고 내버려 두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단독으로 또 많은 사람들과 협력하여 신전(神殿)과 공중(公衆)의 번영을 위하여 싸우겠습니다."
"나는 나의 조국을 내가 물려받았을 때보다도 빈약(弱)하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보다 위대한, 보다 좋은 것으로 만들어 다음 세대에 넘겨주겠습니다."
"나는 현행의 제법 규(諸法規)나 금후 인민(人民)의 전원일치로 써 만들어지는 법규를 준수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가 그 법규를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단독으로 또는 많은 사 남들과 협력하여 그를 저지(沮止)할 것이며 전력을 다하여 법규를 지키겠습니다."
"나는 나의 부친의 종교를 숭경(崇敬)합니다.”
이상의 선서에 거짓이 없음을 아구라울로스(Agraulos), 엔얄리 우스(Enyalious), 아레스(Ares), 제우스(Zeus), 타를로(Thallo), 오 오크소(Auxo), 헤게모네(Hegemone) 신도 조람(照覽)하기를!
아테네의 청년들은 국가 요구에 따라 언제든지 병역 복무를 했으며, 체육장에서 운동을 하고 교육을 받았다. 국가관리는 교육 감독을 포함하여 최고재판소에서 이루어졌으며, 일부 공무원은 소년들의 축제 훈련을 감독하고 지원했다. 짐나시아르크는 횃불 경주에 출전하는 소년들을 선발하고 코치에게 보수를 지급했으며, 코락스는 합창 단, 무용단을 조직했고, 트리에르아르크는 수상 경기를 조정하고 항해 선박을 제공했다.

아테네는 그리스 국가들 중에서도 축제에 대한 애정이 가장 깊은 체육국가였다. 헬레네의 휴일에는 생애의 대부분을 축제와 경기 관람에 쏟았으며, 범헬레네 경기로 알려진 4대 전국체전에는 올림피아, 피디아, 이스트 미아, 네 미아 등의 경기가 포함되었다. 올림피아는 4대 경기 중 가장 유명한 경기로, 제우스를 위한 축제와 함께 4년마다 열리며 전쟁 중인 부족들도 평화를 유지한다. 그리스 전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며, 대회는 신분 상관없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었다. 경기는 올림피아 왕관을 얻기 위한 경쟁이었으며, 부유한 계층이 연습기간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어 이점이 있었다.

피디아는 아폴로를 위한 음악 경연대회에서 시작된 축제로 전차경기와 경마가 주요 경기종목이었다. 이스트미아 축제는 올림피아 경기 이후 2년과 4년째에 육상, 승마, 음악등의 경기와 보트 경기가 열렸고, 네 미아 축제는 아르골리스에서 2년마다 소년 성인의 경기가 열렸다. 축제에서 우승자는 화관을 받아 머리에 씌웠다. 올림피아에서는 올리브 나뭇잎으로 만든 화관, 피디아에서는 월계수 잎, 이스토미아에서는 오란다 미바의 건조된 잎, 네 미아에서는 오란다 미바의 싱싱한 잎이 사용되었다.

후기 아테네 시대에는 '활동적인 인간'보다는 '지혜로운 인간'을 중시하여 체육 교육과 활동이 감소했다. 가정교육과 사립학교, 지적과목, 수사학과 철학 등의 교육을 받았으며 군사훈련도 이수했다. 체육 교육은 중요하지만 의료체육에도 관심이 있었고, 교육자들은 이를 비판받았다. 그러나 체육 교육은 정신건강과 감정 관리에 중요하다는 인식도 있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체육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