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체육사 전기시대의 체육사에 이어 후기 로마시대의 체육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1. 후기 로마시대의 체육
후기 로마시대의 체육은 대제국 건설에 필수적이었다. 로마가 이탈리아 전역을, 그리스 및 소아시아 등 지중해 연안의 많은 섬들을 정복하고 명실상부한 초강대의 제국을 건설하면서, 접촉한 문화를 통해 높은 수준의 문화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로마 문화가 그리스 문화에 동화되었고, 로마의 실용주의 정신이 차츰 개인주의로 바뀌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가게 되었다.
군부지도자들은 원로원의 과두정치를 위협하며, 갈등과 투쟁 속에서 로마제국을 성립시켰고, 이후 첫 황제 시이저(Augustus caesar) 시대의 로마는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경제구조의 모순과 정부 내의 부정부패로 인해 제국의 후기에는 각 지역별로 황제가 선출되며, 로마는 80여 명의 황제들을 거쳐 외부 침략에도 격화되어 마지막으로 패망하게 되었다. 이는 부의 축적과정의 부정, 부패, 잘못된 개인주의, 힘 있는 자의 약탈, 뇌물에 의한 재판, 부유층의 호화스러운 생활과 시민 대중의 비참한 생활 등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물론 생존의 문제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1) 후기 로마시대의 교육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문화에 깊이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은 검소, 실용적인 가치, 생산성, 애국심을 중시하면서 개인적인 추구로 바뀌어갔습니다. 그들은 지적 발전을 추구하지만, 그리스와 달리 체육 등 아름다움의 표현과 조화로운 발달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교육태도는 지적 훈련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였으며, 초등학교에서는 독서, 서기, 산수, 법률 등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중등학교에서는 그리스어나 라틴어의 문법과 문학 등을 중심으로 가르쳤으며, 문법학교에서는 7개의 자유학문, 즉 수사학, 논리학, 산수, 기하, 천문학, 음악, 문법 등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에서는 수사학과 철학 등을 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로마인들은 정치 생활과 직업 생활에서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운동선수보다는 변론가로 자녀를 키우고, 변론술이 로마인들의 실생활에서 실용적인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정시대의 자치체제가 붕괴되면서 변론가는 정계에서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려워졌고, 일반교양교육도 종언을 고하지 않을 수 없어 로마의 교육은 생활에서 유리되고 현실의 사회적 가치를 잃어갔다.
(2) 체육의 목적과 내용
로마의 체육은 군인이나 직업경기자를 위한 것으로, 일반시민들은 건강 유지와 오락을 위해 최소한의 운동만 필요로 했다. 건강유지를 위해 그리스의 의료인들을 고용하고, 건강과 공중위생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로마인들은 체육에 대한 가치를 그리스인들처럼 절대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청소년들에 대한 운동과 무용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로마 철학자들은 청소년들의 학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운동과 무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로마인들은 경기대회를 즐거움을 얻기 위해 관람하는 것으로 여겼고, 직접적인 참여는 품위유지를 위해 기피하였다.
로마인들은 체육을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해 군중심리를 자극하고 통일시키려 했다. 하지만 후기 로마제국에서는 체육활동이 소홀해지고 경기는 비인간적으로 변모해 노예, 죄인, 전쟁 포로 등이 출전하는 유혈적이고 잔인한 경기로 전락했다.
로마인들이 유혈적인 경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전쟁으로 성격이 야생적이고 잔인한 면을 띄게 되어 그런 경기를 찾기 때문이다. 검투사들은 대개 노예, 죄수, 포로가 되지만 일부는 국가 지원을 받아 교육을 받았다. 로마에는 적어도 4개의 검투기 학교가 있었고, 검투사들은 교사와 특별교사의 지도 아래에서 훈련을 받았다.
로마의 경기회는 후기 공화정과 제정시대를 거치면서 횟수와 화려함이 더해졌고,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수많은 새 경기가 추가됐다. 경기 대회 개최를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지출이 필요했고, 후원자들의 후원금을 유인하여 국가재정을 극복했다. 대형 경기장 외에도 다른 경기장이 건설됐고, 경주로의 3개 측면 둘레에 계단식 좌석을 배치하여 건축자재로는 목재와 돌을 사용했다.
로마시대 후기의 스포츠는 다양했다. 젊은이들은 목욕장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고, 서커스와 검투기를 감상했다. 전차경주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고, 일부 여성도 출전했다. 그 외에도 모의전투, 무용, 음악회 등의 다양한 경기가 열렸다. 전차는 낮고 가벼운 바퀴와 말 4마리로 이루어졌고, 경주로를 정확하게 돌아야 했다. 경주는 경쟁이 치열하여 논쟁과 폭동도 일어났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스포츠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달리기, 뛰기, 던지기 등은 염증을 일으키는 경기로 여겨졌다. 권투는 로마에 전해졌을 때 살인적인 스포츠로 변화했으며, 검투기는 일반대중들을 위한 경기였다. 검투사들은 갑옷을 입고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며, 대체로 1:1로 싸웠지만 때로는 집단싸움도 벌렸다. 경기는 종종 죽음으로 끝났지만 군중들이 생명의 구제를 요구하면 엄지손가락을 올리고 경기를 종료했다. 짐승 대 짐승, 사람 대 짐승의 경기도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그리스도 신자와 사자의 싸움은 혐오감을 일으켰다.
로마인들은 제정시대에 다양한 도박놀이를 즐기며 건강을 악화시켰다. 이에 보건체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일광욕, 수영, 보트, 낚시, 사냥, 말타기, 볼링 등을 통해 건강을 유지하려 했다. 체육학자들은 보건체육에 대해 연구하며, 갈렌은 맥박을 통해 신체 건강을 파악하는 기술을 처음 개발하였다. 갈렌은 근육 발달, 속도 운동, 격렬한 운동으로 운동을 분류하였다.
(3) 후기 로마시대의 대형 체육 시설
로마시대의 대형 체육시설로는 키르쿠스 막시무스, 콜로세움, 대욕장, 마르티 우스 훈련장 등이 있었으며, 대표적인 대형 원형 경기장으로는 원형경 기장과 플라미누스 경기장이 있었다. 이들 경기장은 긴 수평면의 경주로와 3개 측면의 계단 좌석을 가졌으며, 거대한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260,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경기장은 국가와 독지가의 지원으로 운영되었으며, 경주자 연맹이 비용을 부담했다. 경기장은 태양빛으로 인해 장관을 이루었으며, 대리석, 황금 장식, 모자이크, 관리들의 옥좌 등이 사용되었다.
콜로세움은 AD 75년에 건설된 대투기장으로, 네로가 기독교인들을 학살한 곳으로 유명하다. 6 에이커 면적에 160피트 높이의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9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다. 지하실에는 검투사의 거실과 동물의 우리, 수도관과 배수관 등이 있다. 대리석으로 만든 좌석에 쿠션을 덮었고, 64개의 출구를 만들어 퇴장 시 혼잡을 막아 주었다.
그리스와 로마에 있는 대규모 공중욕장인 테르매(thermae)은 정부가 지었으며, 시민들의 레크리에이션과 사교의 센터였다. 이 건물들은 대규모로 설계되었고, 사에리스테리움, 웅토리움, 칼다리움 등 다양한 욕실이 있었다. 라코니쿰, 도서실, 라운지, 회랑, 식당 등의 다른 시설도 있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테르메로는 폼페이시의 테르메가 있다.
마르티우스 훈련장은 로마 군대교육과 병사들의 연습을 위한 장소였고, 소년들도 오후면 운동과 경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기 로마 청소년들은 테르메에서 도박과 연회를 즐기며 무용, 전차경주, 검투경기를 관람하는 것을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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