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회 체육의 역사 중 중국의 체육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원시 단계에서 문명단계로 발전한 민족으로 구성된 중국의 역사는 B.C 2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중국은 황하강의 강변을 중심으로 농경생활을 하면서 가족 제도와 조상 숭배의 전통을 이루어가며 사회를 유지하였습니다. 가족들은 가장인 아버지를 존경하고 그 뜻을 따르며 조상을 숭배하여 안정과 질서를 이루었기 때문에 변혁의 기회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지리적으로도 외국의 침략을 받을 우려가 없고 이웃 나라를 정복할 필요성이나 야심도 없었습니다.
탕왕에 의해 왕조를 연 은나라는 갑골문자와 청동기 문화가 발달하였으며 주나라는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왕조를 세웠습니다. 주나라는 원래 은나라에 부속되었으나 발달한 농경 기술과 유럽의 신 무기를 사용하여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화북일대를 지배하였습니다.
주조시대에는 교육에 역점을 두어 실질적인 내용에 치중하고 아동의 심신발달에 힘썼습니다. 개인을 용기 있고 문화적인 성인으로 육성하고 사람을 감화시키는 능력과 원만한 성격을 가진 지도자로 육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었습니다. 특히 조식화된 국립학교 제도를 두어 학생들에게 공자의 경전을 가르치며 그 내용을 암기하도록 하여 과거지향적인 경향을 보였습니다. 시민의 사상이나 행동은 통제되어 있어 사회질서가 고정화되었고 능력과 덕에 의해 관직에 등용되며 정치는 유능한 지식을 가진 자의 손에 맡겨졌습니다.
학교 교육의 교과과정은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여 거의 문화적 학습으로 일관돼있어 활력이 넘치는 체육의 발전은 크게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면서 지적 중심의 교육만으로는 변화의 욕구를 채우기가 불가능하게 되어 신체활동도 교육제도상 교과활동의 한 분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통치자나 귀족자제의 필수과목으로 육예를 규정하였습니다. 육예로는 예, 악, 사, 어, 서, 수 등을 말하는데 이 중에서 사 와 어는 군사적 교과이며 신체활동을 전제로 합니다.
중국 체육의 기원은 B.C 500년경에 한 승려에 의해 문서로 기록된 의료체조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의료체조는 B.C 2600년경부터 행해졌으며 스웨덴의 리우식 체조와 흡사한 강부라는 보건을 위한 체조술을 말합니다. 고대 중국에서 발달한 스포츠로는 축국, 각저, 수박, 격검, 수렵 등이며 유희와 환락을 위하여 무용, 투호, 육박 등이 행하여졌습니다. 춤은 부유층 자제들의 교육에 들어있는 정식과목이었으며 봉건시대에는 무용 능력이 품성판정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예기를 보면 소년 소녀에 대한 고대 교육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13세 때에 음악을 배우고 시가를 부르며 작을 합니다. 15세에 이르면 상을 추고 사와 승마를 배웁니다. 20세가 되면 예를 배우며 모피와 순견으로 된 옷을 입고 대하를 춥니다. 이 춤의 형식은 종교적, 공격적, 방어적, 무언극적 움직임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에 의하면 주 왕조 때 교육기관이 있어 체육을 실시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수도에 있는 다섯 학교 중 한 한교에서 의례, 무용, 궁술 등을 가르쳤다는 겁니다. 소년들은 8세가 되면 학교에 들어가며 다시 15세에는 상급학교에 입 했을 했습니다. 봄과 여름에는 궁술과 무용 및 음악을 학습했고, 가을과 겨울에는 독서와 작문 및 의례를 학습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개발되었던 전차술, 씨름, 복싱, 격구 등은 군사적 필요성과 함께 군사교육 중 오락의 한 수단으로 고안되었습니다. 기원전 1세기 경에는 "+"자 모양의 활이 사용되었고 승마자세는 당대에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궁술이 중요시되어 궁술에 대한 시험과 시범경기가 자주 열렸으며 시범경기 중에는 음악이 은은히 연주되었습니다. 619~1127년 사이에는 검술이 발달되어 학자들도 특별 교육을 받았습니다. 레슬링은 255~618년 사이에 민간인들에게 보급되어 매년 시범경기가 열렸습니다.
복싱, 즉 권술은 527년경 불교가 들어온 이후 광범위하게 행해졌으며 18개의 동작을 주로 한 십팔기가 공격술로 유명했었고, 그 후 32기로 세분화되었습니다.
축국은 가장 오래된 중국 스포츠 중 하나로 군사훈련의 일종으로 장려되었으며, 후에 일반 민중의 대중적 운동이 되었습니다. 축국은 공을 가죽으로 여덟 모 형태를 이루었는데 그 안에는 털을 가득 채운 것이었습니다. 5세기 경에는 부풀린 공을 도입해 사용하였습니다. 경기방식은 경기장의 측면을 따라 여섯 개의 구멍을 만들었고, 공격과 수비로 나누어 겨루기의 행태로 행해졌습니다. 한 제국의 장군이었던 피아오치의 전기에 보면 '몽고 원정 도중에 식량이 모자라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피아오치가 땅에 구멍을 파고 축국을 시켰더니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대에는 이 축국이 발전해서 한 개의 골 포스트를 두고 경기를 하였습니다. 개선문과 흡사한 이 골 문은 대나무 장대로 만들었습니다. 높이는 9~15미터였고 오색천으로 감았으며 골은 직경 30센티가 넘는 빈 공간이었습니다. 선수들은 번갈아가며 이 구멍에 공을 차 넣었는데 보통 한 경기가 70여 개의 골이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승리 한 팀의 선수들에게는 꽃, 과일, 술과 은사발, 양단을 선물로 주었고 패한 팀의 주작은 태형을 당하고 말 못 할 수모를 당했다고 합니다. 체육의 교육 방법은 실천적 방법과 모방적인 단체 훈련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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